헤밍웨이, 오웰, 마르크스는 저널리스트로서 어떤 기사를 썼을까?
세기의 작가들이 구축한 비판적 저널리즘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는 시대를 대표하는 명저의 작가이자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 이들은 저널리스트로서 당시 사회상을 보도하고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기 위해 직접 전투 현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과 평화, 인권과 윤리, 자본과 가난 등의 주제를 이야기하는 데 삶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이들이 던진 의제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과연 ‘가난한 자의 아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지 않는 사회를 이뤘는가? 노동자가 목소리를 내는 일은 왜 중요한가? 언론은 정권의 선전에 휘둘리지 않도록 대중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가? 시리즈 <더 저널리스트>는 이들이 남긴 교훈을 다시 한 번 되짚고, 시대를 좀 더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의도로 기획됐다.
이 시리즈에는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되는 기사와 칼럼이 다수 포함됐다. 기사 모음집의 형태다. 작가의 가치관과 비판 의식은 저널리스트로서 작성한 글에서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픽션과 달리 해석상 오해의 소지가 적고, 시대 배경에 관한 정보도 비교적 명확해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카를 마르크스, 그는 사상가이기 전에 저널리스트였다!
17편의 기사 그리고 <임금노동과 자본>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의 마지막 세 번째 책. 저널리스트 마르크스의 이미지가 가장 잘 드러난 17편의 기사, 그리고 ‘자본론의 입문서’라 불리는 <임금노동과 자본>을 새로 번역해 실었다. 마르크스의 장기적, 보편적 관점을 엿볼 수 있는 기사를 선별했으며, 노동 계층과 서민의 삶을 다루는 기사, 외교 문제와 무역 정책에 관한 기사도 포함됐다. 《자본론》을 쓰기 이전, 기자 마르크스가 물질적 이해관계에 눈을 뜨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자본론》 같은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저널리즘 같은 ‘중간 결과물’ 역시 마르크스가 왜, 어떤 과정을 통해 사상을 구체화했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문 기사와 책, 보고서, 통계 수치를 곱씹으며 기사를 썼던 그의 모습 속에서 저널리스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책 속으로
우리 사회는 소리 없는 혁명을 겪고 있다. 거스를 수 없는 이 혁명은 지진이 자신이 파괴할 건물에 신경 쓰지 않듯 자신이 파괴할 인간의 존재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새로운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기 너무 약한 계급과 인종은 이제 물러나야 한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통탄할 변화가 자본가들, 즉 지주와 대부업자의 소유욕에 우리 사회가 적응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진심으로 믿기도 한다. 이렇게 덜 떨어지고 근시안적인 시각이 또 어디 있을까?
_ <이주 혹은 강제추방> 중에서
성실하고 계획적인 소작농은 바로 그 근면함과 계획성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반대로 무기력하고 어리숙하면 “켈트족의 태생적 열등함”이라는 멸시를 받았다. 소작농은 선택권 없이 가난뱅이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근면해서 가난뱅이가 되거나 어리숙해서 가난뱅이가 됐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아일랜드에서는 ‘소작농의 권리’가 주장되기 시작했다.
_<아일랜드 소작농의 권리에 대하여> 중에서
대다수의 노동자는 고용주를 상대로 저항 행동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 그래서 연대하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게 된다. 그러면 다른 노동자들은 이를 지지하기 위해 자신의 고용주에게 임금 인상을 요구하기도 한다. 한 지역의 노동자들이 애쓰는 동안 다른 지역 노동자들이 하향된 노동 조건을 받아들여 그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말자는 게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신념이자 관심사가 된 셈이다. 이렇게 한 지역의 파업이 저 멀리 다른 지역의 파업 동참이라는 메아리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_<차티스트 운동> 중에서
사실 나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한다. 임금의 상승과 하락, 그에 따른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끊임없는 갈등은 현재 산업 구조에서 노동 계층의 정신을 떠받치고, 지배 계급의 공격에 맞서는 대대적 연대를 구성하기 위한 도구 역할을 한다. 그리고 배만 부른 노동 계층이 무식한 생산 도구로 전락하거나 이런 일에 무관심해지는 것을 방지하기도 한다. 어떤 사회가 계층 간 반목의 토대 위에 서 있는데, 그 사회에서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로 착취 구조를 몰아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전쟁을 치러야 한다.
_<차티스트 운동> 중에서
영국 부르주아 계급이 인도에서 행하게 될 모든 조치는 결과적으로 인도인 대다수가 처한 사회적 환경을 철폐하거나 유의미하게 개선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그건 생산 능력의 향상과 얽힌 문제이고, 인도인이 그 능력을 얼마나 갖출 수 있을지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부르주아 계급은 이 두 가지에 있어서 주춧돌을 놓는 역할은 확실히 하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이보다 더 큰 역할을 한 적이 있기는 할까? 언제나 개인과 국가를 핏물과 먼지 속에 굴리고, 고통과 굴욕을 주면서 발전만 이루지 않았던가.
_<영국 지배하에 있는 인도의 미래> 중에서
부르주아의 시대는 새로 도래한 세계의 물질적 기초를 닦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인류의 상호 의존을 토대로 한 범세계적 교류를 이끌어내면서 방법을 모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산 능력을 향상시키고 기존의 생산방식을 자연의 힘에 대한 과학적 지배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부르주아 경제는 마치 지질학적 격변이 지구 표면을 만들어낸 것처럼 새로운 세계의 물질적 토대를 만들어낼 것이다. 거대한 사회 혁명이 부르주아 시대의 산물인 세계 시장과 현대적 생산수단을 정복하고, 그것들이 진일보한 대중들의 공동 지배 아래 놓인 후에야 인류 발전의 모습이 희생양의 두개골에 넥타nectar를 따라 마시는 이도교적 우상의 모습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_<영국 지배하에 있는 인도의 미래> 중에서
공장주들은 “임금은 식료품 가격과 연동되는 게 아니다. 불변의 수요공급법칙을 따른다”고 말한다. <선데이타임스>는 “노동자들이 공손한 태도로 요청해야 그 요구가 수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공손한 태도가 대체 ‘불변의 수요공급법칙’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무역 도매상들이 커피값을 올리겠다고 “공손한 태도로 요청”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노동자의 피와 땀이 여느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거래될 거라면 최소한 다른 상품과 동일한 기회라도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_<파업> 중에서
자, 파업을 통해 증명된 것은 무엇인가? 노동자들 또한 이해관계가 걸린 고용주의 장담을 믿기보다 수요와 공급의 비율을 잣대로 평가받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는가. 이런 상황이다 보니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실제 시장 가치가 반영된 임금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파업 또는 파업을 하겠다는 위협뿐이다.
_<파업> 중에서
<이코노미스트>는 설탕 증가분 16,500톤 중 상류층의 식료품이나 디저트를 만드는 데 쓰인 분량은 전혀 없다고 전지전능하게 단정한다. 참 대단한 능력이다. 증가분이 오롯이 작업자 계층의 찻잔에 들어간 것처럼 말한다. 나는 이런 전지전능함을 흉내도 못 내겠다. 이제 빵을 구하기 힘드니 자식들에게 설탕을 먹여야 할 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1788년 기근 중에 프랑스 국민들에게 마카롱을 먹고 버티면 되지 않냐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_<경제 번영의 진실> 중에서
노동자 회의가 자신을 선출한 이념을 충실히 따른다면, 미래 역사가들은 1854년의 역사를 이렇게 기록하게 될 것입니다. ‘1854년 영국에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의회가 존재했는데, 그건 런던 의회와 맨체스터의 노동자 회의 –그러니까 부자들의 의회와 가난한 이들의 의회 – 였다. 그중에서 대중을 대변한 의회는 공장주들의 의회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의회였다’고 말입니다.
_<노동자 회의에 보내는 편지> 중에서
성품이 온화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괴롭힘이나 무역으로 개방된 항구에서 외국인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관한 보도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은 물론 더한 일에 관해서도 우리는 아무 소식도 접해본 일이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중국에 살지 않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 나라의 사회・도덕적 현실에 관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금전적으로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닌 이상 괜히 나서서 언급하지 말자는 게 기본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자기 마실 차를 사 오는 식료품점 반경 너머로는 한 치도 내다보지 않는 영국 본토의 국민들은, 이처럼 정부 부처와 언론이 대중의 입에 욱여넣는 거짓 사실을 날름 삼킬 뿐이다.
_<중국에서 벌어진 영국의 잔학 행위> 중에서
프롤로그|나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는다
작가 연보
1부|17편의 기사
빈곤과 자유무역
굶주림 사망 사건
기아라는 형벌
이주 혹은 강제 추방
중국의 혁명과 유럽의 미래
아일랜드 소작농의 권리에 대하여
차티스트 운동
영국 지배하에 있는 인도의 미래
파업
경제 번영의 진실
노동자에 대한 논의
노동자 회의에 보내는 편지
스코틀랜드 소작농 몰아내기
중국에서 벌어진 영국의 잔학 행위
공장 노동 현황 보고
영국 내 경제보고서
중국과의 무역
2부|임금노동과 자본
1장: 들어가며
2장: 임금이란 무엇인가?
3장: 상품의 가격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4장: 무엇이 임금을 결정하는가?
5장: 자본의 속성과 증식
6장: 임금노동과 자본과의 관계
7장: 임금과 이익의 오르내림을 결정하는 일반 법칙
8장: 자본과 임금노동의 이해관계는 완벽히 정반대
- 생산자본의 증가가 임금에 미치는 영향
9장: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이 자본가 계급과 중산층, 노동 계급에 미치는 영향
에필로그|진정성과 공정성
참고문헌
경제학자의 토대가 된 기자 시절의 경험
“경제학자의 말을 의심하라.”
대학에서 진보적인 철학을 논하며 소위 ‘눈에 띄는’ 인물이었던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에 합류한다. 당시 마르크스는 자본가 계급에 대한 문제의식보다 정치 현안과 언론의 자유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편집장에 오른 마르크스는 정부 검열과 싸워가며 신랄한 비판을 실었으나, 주주들의 안일한 대처에 실망해 편집장 자리를 내려놓는다. 그는 “정부의 위선과 어리석음, 원칙 없음에 질렸고, 신문사가 아첨하고 몸을 사리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조심을 떠는 데 질렸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서른셋 되던 해 영국에 안착해 다시 저널리스트로서 언론에 기여하기 시작한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 자격을 얻은 마르크스는 10여 년간 유럽 정세를 기사에 담아 미국 독자에게 송고했다. <라인신문> 시절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을 논한 경험에서 경제학에 눈을 뜨고, 연이은 언론 활동 속에서 “물질적 이해관계”를 들여다본 경험이 마르크스를 경제학자로 이끈 동기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의 장기적 관점이 담긴 기사들
“누가 노동자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가?”
이 책에 담긴 마르크스의 기사는 크게 둘로 나뉜다. 1부는 <뉴욕 데일리 트리뷴> 등의 매체에 실린 기사 17편이고, 2부 <임금노동과 자본>은 소책자로 묶여 출간된 적 있는 연재기사다. 방대한 기사 중에 일부를 고르는 과정이 쉽지 않았으나 나름의 기준을 두었다. 가급적 사건 사고에 대한 논평 기사는 피하고 마르크스의 장기적, 보편적 관점을 엿볼 수 있는 기사를 택했다. 노동 계층과 서민의 삶을 다루는 기사를 담았고, 당시에는 피할 수 없던 주제인 영국의 해외 침략 등 외교 문제와 무역 정책에 관한 기사도 포함했다.
<임금노동과 자본>에 해당하는 기사 원문은 1849년 <신라인신문>에 독일어로 실렸는데, 마르크스가 1847년 브뤼셀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강의 내용을 기반으로 쓰였다. 훗날 엥겔스의 감수를 받은 수정본이 독일어로 출간됐고(1891), 이를 기초로 영문 완역본이 출간됐다(1902). 이 책은 엥겔스의 수정 후 완결성을 높인 영문본을 기초로 했다. 애초에 “선전을 목적으로” 출간된 책이기 때문에 마르크스 본인도 독자에게 전달되는 상황과 저자의 의도에 맞춰 수정되기를 바랐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사상이 구체화된 저널리스트 시절의 기록들
“언론은 어떻게 진실을 왜곡하는가?”
이 책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이념 편향적으로만 소비되어 온 마르크스의 이미지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소개하는 것. 언론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로 인해 마르크스는 물질적 이해관계에 눈을 떴고, 현실 세계의 문제들을 끊임없이 머릿속에 주입할 수 있었다. 한때 저널리스트로서 작성한 기사들은 마르크스가 어떻게 자기 사상을 구체화했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둘째, 좀 더 읽기 쉽고 명확한 번역을 제공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정식 번역의 길이 막혔던 우리 환경의 문제도 있었고, 재원이 부족한 시절 암암리에 번역된 원고는 완성도가 높지 않아 실제 번역되어 나온 원고에서도 종종 고루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표현이 등장하곤 한다. 이 책에서는 최대한 오늘날의 문체에 가깝고 덜 학구적인 용어를 쓰고자 노력했으며, 마르크스에 관심을 갖게 된 독자가 그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돕고 싶었다.
시리즈를 관통하는 물음
“다시 묻자. 무엇이 정의인가?”
마르크스가 쓴 기사들은 대부분 시사 논평의 형태를 띤다. 당대의 중요 사건을 주로 경제적·법철학적 관점에서 논박하는 식이다. 또 장황한 통계 등을 자주 나열하는데,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하나하나 열거하고 분석하는 접근법이다. 오늘날 ‘팩트체크’에 가깝다. 생전 마르크스는 “나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때로 공격적이고 날선 주장을 했지만 실제로 근거 없는 주장은 찾기 어렵다.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의 세 인물 - 헤밍웨이와 오웰, 마르크스를 통해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것이 이 시리즈의 목적 중 하나였다. 무엇이 정의로운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따져 보는 게 저널리스트의 역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중 마르크스는 누구보다 인간의 권리, 제도의 불합리성, 사회 지향점 등을 논한 저널리스트였다. 진실을 바탕으로 윤리적 보도를 하려는 신념, 즉 ‘진정성’을 논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저널리스트 마르크스를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