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깨에 서버를 지고서 계곡을 가로지르고 산에서 흐르는 차가운 냇물을 건넜다. (산악인들은 젖 짜는 아가씨들을 데리고 갔다.) 아침 7시 반에, 우리는 아침(치즈)을 먹으려고 산기슭에서 멈추었다. 아침식사 후에, 우리는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단층 지괴에 반사된 아침 햇살에 마음이 즐거워졌다. 나는 가슴이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곧 기온이 떨어졌고, 음침한 안개가 끼었다. 케이블이 무거워서 우리는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씬넷보다 캣 5(Cat 5)를 사용했더라면 하는 후회를 했다. 우리는 몹시 가파른 경사를 올라갔고, 젖 짜는 아가씨들은 힘들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나는 젖 짜는 아가씨들의 줄을 풀어서, 소가 그들을 끌고 갈 수 있도록 소의 뒤에 연결해 주었다. 그들의 옷에 흙이 좀 묻기는 했지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불평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어려움은 더 심해졌다. 네 명의 가이드는 오후에 일행을 멈추게 하고는, 서로 쑥덕거렸다. 사방을 둘러봤는데, 가이드 중에 아무도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다. 나는 "위"가 어딘지 아는 가이드 한 명을 더 데리고 왔으면 하는 후회를 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길을 잃었다. 나는 랩탑을 씬넷 케이블 끝에 연결해서 베이스 스테이션에 신호를 보내기로 결심했다. 불행히도, 내 PCM 카드는 UTP 커넥션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스위스 아미 칼을 꺼내서 UTP와 씬넷을 연결하는 어댑터로 둘을 연결했다. (스위스 아미 칼은 어느 곳에서나 유용했다.) 나는 통역가들 중 한 명에게 스위스 연방 철도 회사의 URL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 사람은 통역해서 다른 통역가에게 물었고,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나는 그냥 한 번 추측해 보기로 했다. 아마 www.sbb.com일 것 같았다. 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호텔 주인이 치즈 한 조각을 건네주었고, 나는 거기에 영감을 얻어서 www.sbb.ch라고 주소를 입력했다. "ch"는 치즈에 있어서는 최고 수준의 도메인이었다. 불행히도, 사이트가 다운되어 있었다. 스위스 철도 회사도 별 수 없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그 때는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은 에드워드 휨퍼가 1865년에 처음으로 마터호른 산에 오를 때만큼이나 굉장한 것이라고 스텝들을 격려했다. 가이드가 그 때 산에 오른 7명중에 4명이 등반 중에 죽었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우리는 젖소를 데리고 왔으니까 그 때보다 장비를 더 잘 하고 온 것이라고 대답했다. 날씨는 분명히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쉴 곳이 있나 둘러보고, 벼랑에서 약간 아래에 있는 동굴을 발견했다. 얼음으로 된 다리가 동굴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뾰족한 돌들이 800피트 밑에 마치 날카로운 이빨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산악인들에게 서버를 가지고 먼저 가라고 하였다. 한 명이 미끄러지기 전 까지는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놀랐다. 하지만 그 사람은 튼튼해서 가까스로 암벽의 튀어나온 부분을 붙잡았고,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운이 좋았지만, 서버는 그렇지 않았다. 그 사람은 서버를 놓쳤고, 그것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4~5번 바위에 부딪친 후에 바닥에 있는 바위에 부딪칠 때에는 조각이 나 있었다. 서버를 운반하던 사람은 윈도우 NT 대신에 윈도우 2000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코드를 몇백만 줄 더 추가해서 기계의 무게가 더 무거워졌고, 그래서 나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리눅스에 네트워크를 설치하기로 했더라면 일이 훨씬 쉬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얼음으로 된 다리가 이 사건으로 더 약해졌을 것이고, 이 때문에 상황이 심각해졌다. 나는 우리가 네트워크 케이블을 라펠(2중의 자일로 암벽을 타고 내려가는 방법)처럼 사용하여 아래에 있는 동굴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라펠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것이 프로토콜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우리는 계획을 실행했다. 다행히도 소가 코에 고리를 차고 있어서 이 일을 하기가 더 쉬웠다. 우리는 해가 진 후에 동굴에서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한데 모였다. 사람들은 점점 의기소침해졌고, 나는 우리가 밤에 살아남으려면 무언가 과감한 수단을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두 명의 목사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이 때문에 둘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침묵 기도를 해달라고 다시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Windows 2000 Administration in a Nutshell』책을 꺼내서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책에서 찾아보려고 하였다. 밥이 "이봐, 나 너에게 물어볼 게 있어. 만약 네가 이 책을 다 쓴거라면, 책을 썼다는 영예가 모두 너의 상관 미치 툴로치에게 돌아간거지?"하고 물었다. "그건 팀 오라일리의 생각이야. 그 사람은 툴로치같이 유명한 사람이 책을 썼다고 하면 책이 더 잘 팔릴 거라고 생각했어. 나에게는 대리인이 필요할 것 같아."라고 나는 슬프게 대답했다. 나는 추위와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불쌍한 우리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동굴은 작았고, 화장실로 쓸 공간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 치즈는 많았다. 나는 다시 책을 보려고 돌아앉고서 내가 책에서 혹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책을 펼쳐 보았다. 3장과 4장은 터미널 서비스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나는 이것을 읽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을 찾았다. 하지만 나는 차마 "마지막"이라는 말을 동료들에게 할 수는 없었다. 7장은 커멘트 라인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이 부분에서 나는 위기에 처했을 때의 통제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나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나의 동료들에게 명령을 할만큼 마음이 굳지 못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할 지 알았다. 나는 20권의 책을 다 풀고 페이지를 하나씩 찢어서 불을 필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내 불쌍한 책이 타는 것을 보니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내가 보낸 밤 중에 제일 긴 것 같이 느껴졌다. 마스카라가 번졌다. 아침 햇살이 비칠 때, 책은 마지막 한 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우리가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고, 우리는 곧 희망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 손에 있는 찢어진 페이지를 보고는 기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부분에서는 윈도우 2000 CD를 설치하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아.. CD! 우리는 정보 기술 전문가이며, 네트워크 분할 점이나 디스크 이미징, 원거리 설치 서비스 등 항상 더 쉽고 다루기 쉬운 배치 방법을 찾았는데 이러한 우리가 처한 상황은 정말 바보 같았다. 결국,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는, CD는 우리가 하루를 허비하지 않게 하고, 그 상황에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구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나는 가방을 열고는, 거꾸로 들고 모든 내용물을 다 바닥에 쏟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CD를 샅샅이 찾았다. 나는 벼랑 끝에 서서, CD를 태양 쪽으로 치켜들어서 아래에 있는 저마트 기지에 신호를 보내기 위해 그것을 거울같이 사용하였다. 몇 분 후에, 그들은 응답의 사인을 보냈다. 그들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철도를 짓고 있다고 했으며, 3시간 27분 안에 우리를 구조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동료들에게 모든 것이 3시간 27분 안에 괜찮아 질 것이라고 격려하고, 남은 시간동안 스위스 아미 칼로 마지막 남은 치즈에 이 이야기를 새겨 넣었다. 구조 노력은 성공적이었고, 우리는 어려움을 많이 겪은 후에 그 날 늦게 별장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처음에 계획했던 굉장한 작업은 결국 실패했지만, 스위스 연방 철도 회사는 우리에게 평생 사용할 수 있는 철도 이용권과 액자에 든 마터호른 산의 그림을 주는 등 후하게 사례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우리 모험을 적어 넣은 마지막 치즈 조각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나는 그것을 씬넷에 묶어서 목걸이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것을 목에 차고 있다. 그 목걸이는 내가 마터호른에서의 원정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소중한 물건이다. 내가 친구가 많지 않은 것은 이상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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