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한귀은
여자는 자기 남자의 신발에 발을 넣어 보면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의 피로와 삶의 무게를. 그래서 아직 남아 있는 그 신발의 온기에서 슬픔을 얻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 커다란 신발에 들어가 있는 자기의 작은 발 때문에 그의 보호를 받는 것 같은 느낌도 받습니다. 물론 신발에서 냄새라도 난다면 그 사람이 좀 더 귀엽게 여겨져서 달려가 그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주게 될지도 모릅니다. 애칭이라도 몇 개 곁들여서 그의 기를 살려줄 수도 있을 거예요. 물론 그 사람이 너무 사랑스러울 때에 한해서 말이지만요.
이런 것도 인문학적 감성이라고 한다면, 너무 아전인수 같을까요? 사실 이것은 여자의 동일시 능력입니다. 여자의 전이 능력이라고도 하지요. 여자는 이 동일시, 전이 능력 때문에 더 극적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란도》에서 남자와 여자로 400년 이상을 살았던 "올란도"는 남자였을 때보다 여자였을 때 진실로 행복해 했는데, 그것은 여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기에게로 전이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덧붙여, 일부러 남자의 신발에 자기 발을 넣어볼 줄 아는 여자는 실험적이며 창의적인 여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소한 순간의 느낌을 포착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말"로 연인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소중한 사랑을 더 갱신하고 연장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여자는 세 부류로 나눌 수 있겠지요. 자기 남자의 신발에 발을 넣어본 적 없는 여자와, 넣어본 적 있으나 그 뜨듯함만 느끼고 약간의 이물감과 함께 자기 발을 빼버린 여자, 그리고 그 속에서 남자의 피로와 슬픔을 감지하고 나아가 사랑과 행복까지 만끽하는 여자.
《
모든 순간의 인문학》은 이 세 번째 여자를 지향합니다. 결국 이 책의 독자들은 "여자"라는 말인데, 한편으론 그런 "매력적인" 여자를 사랑하길 원하는 남자들도 이 책으로 이끌고 싶은 저자로서의 욕심도 없지 않고요.
이 책의 집필 의도
언젠가 "인문학 펍
Pub"을 열어보리라 꿈꾼 적이 있습니다. 정년퇴직 전에, 예순이 되기 전에, 어떤 컨셉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어떤 분위기를 조성할 것인가도 계획했었지요. 내부 인테리어와 메뉴까지도 상상했었습니다.
인문학 펍을 열려고 했던 이유와 이 책을 쓴 의도가 정확히 일치합니다. 저는 인문학적 대화를 꿈꾸었습니다. 인문학적 대화와 감성을 나눌 수 있는 시공간으로서 "인문학 펍"과 《모든 순간의 인문학》을 기획한 것입니다. 카페나 찜질방에서의 대화도 인문학적 감성으로 나눌 수 있고, 밥을 먹으면서 건네는 위로의 말에도 인문학적 진정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문학적 감성은 일종의 "문화자본"을 키워줍니다.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
habitus: 계층별 습관이나 취향를 경직되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부르디외는 계층별로 구별짓기를 한다고 해서 상류층이 다른 모든 계층을 소외시킨다고 했지만, 돈만 많다고 상류층이 되는 것이 아니죠. 경제자본이 곧 문화자본(문화적, 상징적 능력)은 아니니까요. 인문학은 문화자본을 높여주고, 나아가서 이 문화자본은 수시로 경제자본이 되기도 합니다. 이 책이 품위 있는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문화자본의 매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인문학과 좋은 책과 영화, 그것에 대한 사유의 합금이 품위 있고 감성적인 아비투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대화"를 하고 오라고 과제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의 내용, 분위기와 느낌 등을 수업 시간에 발표시켰지요(참으로 실험적인 선생이지 않은가요?). 의외였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학생들은 너무나 다채로운 인문학적 대화 경험을 소개했습니다.
이 책이 그런 인문학적 대화의 촉매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은 "모든 순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모든 순간에 인문학적 성찰이 매개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극히 시시콜콜하고도 사적인 상황에 대한 인문학적 감성을 전하고 있지요. 소위, 인문학 콜라주입니다. 이 책이 인문학 콜라주이듯이, 삶도 아름다운 인문학 콜라주이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썼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편집자 이야기
권미경 편집자님은 "인문학 펍"을 열면 마담으로 들어앉히고 싶은 여자입니다. 그만큼 감성적이면서도 믿음직스러워요. 사실, 감성적이면서도 믿음직스럽기는 쉽지 않습니다. 감성은 하릴없이 변덕으로 오인될 만한 증상을 수반하기 때문이지요. 즉, 감성이란 게 충만하면 충만할수록 변인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그것이 얼핏 변덕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권미경 편집자님은 감성과 진득함을 다 갖고 있어요.
또한 알고 보니, 은근하게 직설적이고 조용하게 솔직한 여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직설적이고 솔직한 여자들이 갖는 씩씩하고 강한 어조 대신, 나긋하고 사근사근한 톤으로 솔직한 직설을 구사하니 그 힘이 정말 세요. 넘어가지 않을 수 없어요. 뭐라도 해낼 여자입니다.
저자가 뽑은 이 책의 한 문장
- 짝사랑을 어떤 범주에 넣어야 한다면, "사랑"이 아니라 "성숙"일 것이다.
- 매력적인 사람이 된답시고 자신을 모호한 이미지로, 신비스러운 존재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라, "이상한 사람"이다.
- 바람난 여자가 비열할 때 가장 추하고, 바람난 여자가 진실할 때 가장 위험하다.
- 콤플렉스는 꼭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잘 이용하라고 있는 것이다.
- 진짜 사랑은 끊임없이 빼기를 하는 과정이다. 그 사랑 속에 사랑만 앙상하게, 혹은 위태롭게 남을 때까지.
- 서로를 잘 앎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 결핍은 어떻게 해도 잘 사라지지 않는 질긴 것이기 때문이다. 만족감이 한시적이고 일회적인 것이라면, 결핍감은 지속적이고 자주 덧나는 습관 같은 것이다.
- 이 시대의 칭찬은 단지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한 일시적인 처방이 아니라 우리를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 이끌고 특별한 관계를 만드는 힘이 있는 언어다.
- 신이 인간에 대해 가장 부러워하는 게 다름 아닌 "죽을 수 있다는 것"이라는데,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신이 부러워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인간은 밥벌이를 하면서 온갖 슬픔과 피로와 모호한 행복과 뜬금없는 감격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 불행한 자에게는 묘한 허영이 있다. 자신의 불행에 가치를 부여해야만 그 불행을 견디며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그렇게 호락호락 불변의 이미지를 우리 머릿속에 각인시키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신비롭고, 그래서 단 하나의 초상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 사랑밖에 모른다고 슬퍼하는가? 사랑밖에 몰라도 된다. 진짜 사랑은 사랑 이외의 전부를 가르친다. 신뢰와 존경과 배려와 안정과 노력하는 법과 나 자신을 읽는 독법과 고통을 견디는 내성까지. 사랑으로 사랑을 배울 수는 없지만, 사랑 이외의 것은 배울 수 있다.